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심심할 땐

감성 터지는 날엔......좋은 시 추천

by 망고맛치약 2021. 4. 13.

 

 

 

즐거운 편지

 

황동규

 

내 그대를 생각함은
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
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 일것이나
언젠가 그대가
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
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
그대를 불러보리라

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
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
바꾸어버린 데 있었다
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
내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
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
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
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

 

                     

「삼남에 내리는 눈」 중

 

 

 

 

 

 

질투는 나의 힘

 

기형도

 

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

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

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

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

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

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

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

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

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

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

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

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

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

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

 


「입 속의 검은 잎」 중

 

 

 

 

 

 

두번은 없다

 

비스와바쉼보르스카

 

두 번은 없다. 지금도 그렇고
앞으로도 그럴 것이다. 그러므로 우리는
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
아무런 실습 없이 죽는다.
 
우리가,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
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
여름에도 겨울에도
낙제란 없는 법.
 
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.
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,
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,
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.
 
어제, 누군가 내 곁에서
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,
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
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.
 
오늘,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,
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.
장미?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?
꽃이었던가, 돌이었던가?
 
힘겨운 나날들, 무엇 때문에 너는
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.
너는 존재한다 -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
너는 사라진다 - 그러므로 아름답다
 
미소 짓고, 어깨동무하며
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.
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
서로 다를지라도….

 

 

「끝과 시작」 중

 

 

 

 

 

 

하늘의 천

 

윌리엄 버틀러 예이츠

 

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

하늘의 천이 있다면,

 

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

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,

그 천을 그대 발 밑에 깔아드리련만 

 

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

내 꿈을 그대 발 밑에 깔았습니다. 

 

사뿐히 밟으소서,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.

 

 

「갈대 밭의 바람 The Wind Among the Reeds」 중

 

 

 

 

 

 

첫사랑, 여름

 

유지원

 

후덥지근한 교실의 여름과 절정의 여름,
레몬향이 넘실거리는 첫사랑의 맛이 나
햇살을 받아 연한 갈색으로 빛나던 네 머리카락,
돌아갈 수는 없어도 펼치면 어제처럼 생생한,
낡은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단편 필름들.

 

말미암아 절정의 청춘, 화성에서도 사랑해는 여전히 사랑해인지

 

밤이면 얇은 여름이불을 뒤집어 쓴 채 네 생각을 하다가도
열기에 부드러운 네가 녹아 흐를까 노심초사 하며,
화성인들이 사랑을 묻거든 네 이름을 불러야지 마음 먹었다가도
음절마저 황홀한 석 자를 앗아가면 어쩌지 고민하던

 

그러니 따끔한 첫사랑의 유사어는 샛노란 여름

 

 

(2018 제 26회 대산청소년문학상 중등부 시 부문 동상 수상작)

 

 

 

 

 

 

사막

 

오르텅스 블루

 

그 사막에서 그는
너무도 외로워
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
자기 앞에 찍힌발자국을 보려고

 

 

「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」 중

 

 

 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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